당구 예찬: 균형과 삶
정한효
세상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안과 갈등을 전한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는 기본과 원칙이 무너지는 이야기뿐이다. 마음이 흔들리고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 나는 당구클럽을 찾는다. 그곳에서는 잠시 세상의 소란을 잊고, 균형과 질서를 만날 수 있다.
당구대의 프레임은 500kg의 무게로 제자리를 지키며 어떤 진동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림 없이 받쳐주는 무게는 든든한 위안이 된다.
안정된 무게만이 아니다. 당구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칙도 품고 있다. 모든 당구대의 가로세로 비율은 2:1이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완전한 조화의 비율로 본 숫자. 현악기의 옥타브도 같은 비율에서 나온다.

당구대 위에서 나는 우주의 조화를 본다. 혼탁한 세상과 달리, 거기에는 흔들림 없는 균형과 질서가 있다.
금수저, 흙수저를 거론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당구대의 ‘슬레이트(Slate)’를 떠올린다. 공이 구르는 이 상판은 대리석과 석회암을 갈아 반듯하게 다듬는다. 무엇보다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완전한 평형을 추구한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그 위를 덮는 특수 당구천 ‘클로스(Cloth)’는 마찰과 속도를 조절하며 파란색이다. 빨간 카펫이 권위와 특권을 상징한다면, 파란 카펫은 평화와 신뢰, 지속 가능성을 뜻한다. 평등과 평화가 깃든 슬레이트 위에서는 누구나 편견 없이 공을 굴릴 수 있다.
요즘 세상살이는 각박하다. 사람들 사이에 심리적 완충이 사라져, 사소한 스침에도 시비가 붙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다.
그러나 직사각형의 당구대에는 숨겨진 ‘쿠션(Cushion)’이 있다. 목재 테두리인 ‘레일(Rail)’ 안쪽에 고무 반사대가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한 반사각을 유지하면서도 다가오는 공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부드럽게 되돌려 보낸다.
사람 사는 세상도 서로 부대끼며 살면서 이런 쿠션을 품을 수는 없을까. 유머와 여유가 있어야 할 자리에 긴장감만 가득하지만, 당구장은 늘 반듯하고 깔끔하게 준비되어 있다. 삶의 경기장도 이처럼 부드럽고 균형 잡힌 무대였으면 좋겠다.
이제 경기장을 누빌 공을 살펴보자.
지름 61.5mm, 63.5, 65.5mm, 세 종류의 여의주 같은 이 공은 거의 완벽한 구형으로 정밀 제작된다. 한때 상아로 만들었으나, 변형과 남획 문제로 지금은 고강도 합성수지 ‘페놀릭 레진’을 사용한다.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빛나는 표면은 매끄럽고, 홍백 또는 빨강·하얀·노란 색으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거울 같은 표면 속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에도 둥근 빛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까 상상한다.

공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큐(Cue)’다. 대체로 단풍나무 재질인 곧은 큐가 공을 치는 순간, 다양한 곡선이 펼쳐진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큐 끝에 바르는 ‘쵸크(Chalk)’는 회전을 정확히 걸고 미스를 방지한다. 파란 쵸크 가루는 전사의 얼굴에 분칠하듯,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격려를 전한다. 큐를 위해 자신의 몸이 희생되는 정신도 담겨 있다.
이렇듯 반듯한 당구대와 반짝이는 공, 곧은 큐와 쵸크의 헌신 앞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당구는 신사의 스포츠라 불리며 나비넥타이를 한다.
전투 준비가 끝났다. 전사는 사냥감을 포착한 사자의 눈빛으로 긴장감이 돌지만 몸은 힘을 뺀 자세로 웅크려 큐의 ‘그립(Grip)’을 가볍게 쥐고 사냥감을 주시한다. 수구와 목적구의 위치를 가늠하며 머릿속에 가상의 궤도를 그린다. 눈 깜짝할 사이, 전략과 전술은 완성돼야 한다. 중얼대고 망설이며 시간을 끌면 곧바로 “시간 견제 (겐세이)”라는 핀잔이나 제재가 따른다. 설계가 끝나면 수구 앞에 ‘브릿지(Bridge)’를 살며시 내려놓는다. 모든 연결에는 다리 역할이 필요하며, 견고한 브릿지가 때로는 승패를 가른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당구도 바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적당히 벌려 안정된 두 발과 큐, 수구, 제1적구를 향한 시선은 고도로 훈련된 저격수를 연상시킨다. 숨을 고르고, 방아쇠를 당기듯 힘을 빼며 부드럽게 샷을 날린다. 끌 때와 밀 때의 타점과 큐 스냅이 달라지며, 각도와 회전에 따라 수구의 움직임이 현격하게 달라지므로 같은 방향으로 보내도 각자의 개성과 숙련도에 따라 결과값이 다르다.

탁구나 테니스처럼 주고받는 경기가 아니라, 당구는 온전히 자신만의 플레이에 집중해야 한다. 상대가 있더라도 사실 경쟁은 골프처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탄탄한 기본기와 꾸준한 노력이 더해지면 누구나 일정 수준에 오를 기회가 열리지만,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길은 아득하고 깊은 열정을 쏟지 않는 한 순탄치 만은 않다.
당구에서 ‘키스(Kiss)’는 공들의 뜻밖의 충돌을 뜻한다. 고수에게는 실패를, 하수에게는 뜻밖의 행운을 선사하며, 세상이 자로 잰 듯 흘러가지 않음을 보여준다. 불어인
‘마세(Masse)’는 큐를 세워 특수한 회전과 커브샷을 만들어 내는 기술로, 높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섣불리 시도하면 바닥을 손상시킬 수 있어 하수에게는 금지된다.
고수도 아닌 내가 당구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것은 친구 L의 제안 덕분이다. 얼마 전, 함께 당구를 치고 저녁을 나누던 친구는 내게 당구에 관한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당구를 알수록 삶의 교훈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균형과 평등, 원형과 직선의 조화, 노력의 대가—이 모든 가치가 숨 쉬는 곳이 바로 당구장이다.
이전에는 단순한 시간 보내기 장소로 여겼지만, 지금은 모든 비품과 기술 안에서 삶의 이치를 느낀다. 무슨 일이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배움의 장이 된다.
당구의 신(神)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자 약력>
• 성명 정한효
• 숭실대학교 경영대학원(석사)
• 한국전력공사 근무(전)
• 2019년 충청북도 도민백일장 산문 장원
• 2025년 월간문학 수필부문 등단
[방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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