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역사는 단순한 승패 기록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언제나 치열한 라이벌 구도가 있었고, 그 속에서 감동과 열정의 서사가 완성됐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라파엘 나달(스페)이 10년 넘게 세계를 양분했다. 우아한 테크니션 페더러와 투지의 나달이 만들어낸 맞대결은 단순한 랠리를 넘어 예술과 투지가 충돌하는 대서사시였다.
축구 역시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의 경쟁으로 15년 이상 뜨겁게 달아올랐다. 천부적 재능의 메시와, 압도적 피지컬과 노력으로 정상을 지킨 호날두의 대결은 팬들에게 “누가 진정한 역대 최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라이벌이 있었기에 팬들은 더 몰입했고, 스포츠는 더 큰 무대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처럼 스포츠 흥행의 핵심은 언제나 ‘라이벌 서사’였다. 그리고 지금, 프로당구 LPBA에도 그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주인공은 김가영(하나카드)과 스롱피아비(우리금융캐피탈·캄보디아)다. 정확히 말하면 ‘재점화된 서사’다.
스롱이 LPBA 무대에 합류한 2020-21시즌부터 두 사람은 ‘두 개의 태양’으로 불리며 무대를 양분했다. 그러나 스롱의 부진이 이어지고, 지난 시즌 3차전부터 올 시즌 1차전까지 김가영의 독주가 계속되면서 라이벌 구도는 사실상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스롱이 올 시즌 2~3차전을 연속으로 제패하며 과거의 균형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통산 네 번째 결승 맞대결로 성사된 이번 4차전 결승은, 무너졌던 균형을 다시금 세워 올린 무대이자 ‘라이벌 서사’의 부활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평가받았다.
이날 ‘여왕’ 김가영이 스롱피아비를 세트스코어 4:2로 꺾고 통산 1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들어 두 차례씩 정상에 오른 두 선수는 다시금 팽팽한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무엇보다 이날 결승은 유튜브 동시 접속자 4만1072명을 기록했다. 단순한 승부가 아닌, 라이벌이 만들어낸 흥행의 힘이 수치로 입증된 것이다.
이에 7시즌째를 맞는 프로당구는 즐겁다. 팬덤이 형성돼 있지만 당구계 외부로의 인기 확장을 고민하는 차에, 매우 효과적인 흥행카드를 다시금 손에 쥐게 된 셈이다.
여자부 무대에서는 뚜렷한 흥행 가능성이 보여왔다. 베테랑의 벽을 넘으며 성장하는 신예들, 2000년대생 선수들의 약진, 그리고 이들이 팀리그를 통해 확보한 팬심. 여기에 불을 붙이는 카드가 바로 김가영-스롱 라이벌 구도다.
결승 직후 기자회견은 서로를 향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승리자 김가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3쿠션에서 스롱보다 한참 후배라 경험 면에서 월등하다는 게 보였다. 게임 운영 능력이나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게 많다. 그래서 누가 라이벌이다 말씀들 하셔도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다만, 팬들이 재미있게 봐주시니 기분 좋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쉽게 승리를 놓친 스롱피아비는 ‘가영 언니’와 다시 맞붙을 날을 벌써부터 고대하고 있었다. 통산 전적에서는 7승5패로 아직 앞서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여제’를 쫓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번 결승전에서 (가영) 언니의 힘을 빼고 치는 스트로크가 대단했다. 그런 점을 배우고 싶다. 다음에는…”
스롱은 김가영의 독주에 긴장을 불어넣었고, 김가영은 그 맞수를 꺾으며 우승의 가치를 배가시켰다. 팬들은 예측 불가능한 긴장에서 환호했고, 두 사람의 다음 맞대결을 기다리게 됐다.
김가영과 스롱의 라이벌 구도는 LPBA, 더 나아가 프로당구 전체가 팬들에게 ‘계속 봐야 할 이유’를 제공했다. 두 선수의 경쟁은 매년 진화를 거듭하는 LPBA를 한 단계 더 높은 무대로 끌어올릴 것이며, 더 많은 신예들에게도 꿈의 무대를 열어줄 원동력이 될 것이다.
결국 팬들은 두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마다 환호하며, 그 서사의 다음 장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상연 기자/큐스포츠뉴스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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